퇴촌지역유래

광동리(光東里)

1923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1) 광복동(光復洞ㆍ광백이)
이 마을은 풍광(風光)이 아름답고 항상 햇볕이 가득한 마을이라고 해서 '光復洞'이라 하는데 속명으로는 '광백이'라 부른다.

(2) 동지벌촌(東地筏村)
조선조 인조왕대에 병자호란을 맞아 군량미를 전국 각처에서 거두어 드릴 때 이곳 넓은 벌판 마을에서 군량미를 가장 많이 내는 마을이란 뜻으로 '동지벌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도수리(陶水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도지동(陶池洞)과 수동(水洞)을 합하여 

(1) 도지동(陶池洞)
이 마을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옆에는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해서 '도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2) 수동리(水洞里ㆍ참새미)
옛날 이 마을에 살던 김생원이라는 집 앞마당에서 맑고 찬 샘물이 솟아나와서 마을이름을 찬( ), 샘(泉)이라 뜻으로 '참새미'러 부르고 한자로는 '水洞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3) 삼백(三白)골
옛날에 이 마을에는 백씨 성을 가진 부자 세 사람이 살았는데 인심이 좋아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었다고 해서 '삼백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4) 탑선동(塔仙洞)
조선조 초기에 이 마을에는 탑이 있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 탑에다 빌면 무엇이고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마을의 처녀ㆍ총각들이 이 탑에 비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을이름을 '塔仙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우산리(牛山里)

마을 주위에 있는 산의 형세가 마치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瓦牛形)이라고 해서 

(1) 박석(朴石)거리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는 박씨와 석씨가 집단으로 대를 이어 거주한다고 해서 '박석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2) 소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형태가 앵소모양같이 생겼다고 해서 '앵소산'이라 하기도 하고 '소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산밑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소미'라 하게 된 것이다.

(3) 절막
앵자봉 주위에는 학문을 닦기 위하여 사람들이 공부하는 암자가 많았으니 천진암(天眞庵), 백년암(百年庵), 일출암(日出庵) 등의 있는데 그 가운데 천진암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절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마리(道馬里)

이곳에 사람을 괴롭히는 여우를 한 도공(陶工)이 죽이자 그 죽은 여우의 혼이 다시 사람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혼을 누르기 위하여 질(陶)로 말(馬)을 만들어 여러개를 이 고개에 세웠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곳을 '도마리'(陶馬里)라 하였는데 그 후데 '道馬里'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음리(觀音里)

1923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에 관음동(觀音洞), 도장동(都長洞), 절골을 통합하여 

(1) 도장동(都張洞)
옛날부터 '도장동'이라 불러왔는데, 지금은 '도장동'(都張洞)이라 쓰지만 도압동(道壓洞), 도장동(道張洞)이라고도 쓰이지만, 이 말은 필경 불도(佛道)를 닦는다는 '도장'이 변하여 이루어진 지명이라 생각된다.

(2) 절골
이 마을에는 마을 사람 모두 따르는 고승이 사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절골'(寺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무수리(無愁里)

예전에 이 마을에는 광산(光山) 김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었는데 경기차 좋고 인심이 후한 곳으로 마을 주민들이 모두 '근심없이 모두 산다'고 하여 '무수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동리(嶺東里)

조선조 초기에 광주목사(廣州牧師)가 이곳을 지나다가 동쪽 큰고개 밑에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했다 해서 

(1) 거먹골
이 마을 중앙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속에는 큰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마을애 무슨 흉사가 있을때면 나타나서 예고를 해 주었다고 해서 '거북골'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이 말이 변하여 '거먹골'로 변했다는 것이다.

(2) 구룡동(九龍洞)
아주 먼 옛날에는 이 마을은 바다였다고 한다. 이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큰 연못이 하나 생겼는데 어느 여름에 비가 주야로 4일가 쏟아지더니 이 못속에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구룡동'이라 하게 되었다.

(3) 석둔(石屯)
옛날에 이 곳에서 전쟁이 있을 때 돌로 진을 쳐서 석진(石陣)을 만들었다고 해서 애초에는 '석진'(石陣)이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석둔'(石屯)이 되었다고 하며, 또 일설에는 석씨 성을 가진 장군이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고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었다고 해서 '石屯'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오리 (梧里)

이 마을 한가운데 커다란 오동(梧桐)나무가 한 그루 있어 그 나무의 상태를 보아 일년의 길흉을 점쳤다고 하여 '오동나무골'이라 하다가 한자로 '梧里'라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3년 팔당댐이 생긴이래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정지리(亭支里)

1923년 행정구여 개편 당시에 

(1) 정자동(亭子洞)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 이 마을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정자동'이라하게 되었다.

(2) 지위동(支渭洞)
조선시대에 한양에 사는 고관대작댁 자제들이 이곳에서 한가롭게 낚시질하던 곳이 기산위수(奇山渭水)라 하여 애초에는 '기위동(奇渭洞)이라 하였으나 후에 '자위동'이라 부르게되었다.

원당리(元堂里ㆍ원댕이)

예전에 이 마을에는 날씨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1) 가생이골
이 마을은 원댕이 맨 가상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가생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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